창경궁의 편전, 문정전
문화원Ⅰ 2013.12.13
 



문정전은 창경궁의 편전으로 임금이 평상시 정사를 보던 곳입니다. 기록에 따르면 편전이면서도 왕실의 신주를 모신 혼전으로 자주 사용하였습니다. 편전은 정전의 뒤편에 일직선상으로 지어지는 것이 원칙이나 문정전의 경우 명전전과 90도 방향으로 튼 남향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건물은 궁궐의 편전건물로서의 격식을 크게 강조하지 않고 있으며 앞면 3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되어 있습니다. 높지는 않지만 2층으로 된 월대 위에 조성되었으며 앞마당은 행각으로 둘러져 있어 독립된 공간을 형성하고 있습니다.
현재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86년에 새로 복원되었습니다. 2006년에는 사회에 불만을 가진 사람에 의해 불이 났으나 바로 불을 꺼 큰 피해를 막았습니다. 영조의 비 정성왕후의 혼전으로 쓰일 때에는 휘령전으로 불렸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혔던 사건의 현장이 바로 이곳입니다.



영조의 재위 기간 중 창경궁 문정전은 영조의 첫때 왕비 정성왕후의 위패를 모셔 놓은 혼전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일찍이 세상을 떠난 정성왕후의 위패는 3년 상을 치른 뒤 종묘에 모셔져야 했지만 남편인 영조가 살았있었시 때문에 먼저 종묘에 들어갈 수 없어 영조와 함께 종묘에 들어갈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경희궁에 머물고 있던 영조는 첫째 왕비였던 정성왕후의 위패를 모신 휘령전에 자주 들려 대리청정하고 있던 사도세자와 함께 참배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영조 38년 영조가 휘령전에 들렸을 때 세자가 병을 핑계로 나타나자 않자 그렇잖아도 비행을 일삼는 사도세자를 불신하고 있던 영조는 노여움이 치솟아 세자에게 칼을 내려 자결을 명했습니다. 신하들의 만류와 사도세자의 애원으로 자결이 실패하자 영조는 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뒤주에 가두도록 하였습니다. 아들을 뒤주에 가둔 영조는 손수 뒤주 뚜껑에 못을 박아 가두고  뒤주에 갇힌 세자는 8일 만에 더위와 허기에 지쳐 창경궁의 선인문 부근에서 숨을 거두는데 이를 임오화변이라고 합니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게 된 데에는 영조의 두 가지 약점이 크게 작용하였는데, 바로 천한 무수리의 아들이라는 것과, 경종을 독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최씨는 궁궐 내 최하위 계급인 무수리 출신이었고 철저한 신분사회인 궁궐 안에서 영조는 자신의 신분에 대한 컴플렉스를 느끼며 다혈질적이고 신경과민적인 성격을 가지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경종의 병환이 깊어지자 형의 쾌유를 빌며 영조가 지어 올린 음식을 먹고 경종이 죽게 되자 영조가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궁궐 안에 돌게 되었습니다.  
영조의 이런 약점을 감싸주고 왕위에 올려준 당파가 노론세력이었습니다. 영조가 임금이 되자 소론은 몰락하고 노론이 득세하여 권력을 휘둘렀지만 영조는 이에 동조하거나 방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도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이런 상황들을 보며 자라왔기 때문에 노론세력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이에 노론은 끊임없이 사도세자의 흠을 부각시키고 영조를 부추기게 됩니다. 약점에 병적이고 완벽주의적 성향을 가진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미워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의 엄격한 질책을 견디지 못한 사도세자는 우울증세가 점점 깊어져 정신이상 현상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런 오해들이 쌓이고 쌓여 사도세자를 죽이는데까지 가게 되며 이 사건을 통해 당시의 노론과 소론 간의 당파싸움이 얼마나 진흙탕 싸움이었는지 볼 수 있습니다.
세자가 죽은 후 영조는 깊이 후회하여 죽음을 애도한다는 뜻의 사도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는 왕위에 오른 첫 교지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도 하여 효심을 나타냈습니다. 또한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공식적으로 밝혀 관련자들을 처벌하였습니다.

숭문당과 함인정
창경궁의 정전, 명정전 일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