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화당, 영춘헌 일대
문화원Ⅰ 2014.02.07
 


통명전의 동쪽으로 나란히 위치한 양화당은 왕이 주로 사용하였던 곳으로 정면6칸 측면4칸의 규모로 초익공 양식의 팔작지붕건물입니다. 八作 지붕의 마루는 취두와 용두를 장식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양화당 추녀마루에는 잡상을 하나만 올려놓았습니다. 기단을 이중으로 쌓았고 양화당 북쪽 뒤 언덕은 통명전 건물 뒤 화계와 이어져있고 연가를 얹은 굴뚝 2기가 높이 서 있습니다.
명종이 독서당의 문신을 불러 시험을 보기도 했으며 병자호란으로 남한산성에 몽진했던 인조가 삼전도에서 청나라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한 후 환도하면서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또한 철종의 비 철인왕후 김씨가 고종 15년에 이곳에서 승하 하였습니다. 수많은 사건이 있었지만 유독 양화당만 꿋꿋이 살아남아 이 자리를 지켰습니다.

-3배구고두례(三拜九敲頭禮) : 1637년 1월 병자호란 발발 45일 만에 인조임금은 항전하던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에서 굴욕적인 항복을 했습니다. 9층으로 마련된 수항단 위해 청 태종-홍타이치-을 향해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 의식이 있었습니다.

 

 
창경궁에서 후궁이 살던 곳은 어디일까요? 통명전이 중궁전이라면 영춘헌과 집복헌은 후궁들의 처소입니다. 후궁들이 살았던 곳이라서 그런지 다른 건물에 비해 규모도 작고 화려하지 않습니다. 집복헌은 영조11년(1735)1월 사도세자가 탄생한 곳입니다. 세자의 모친은 영조의 후궁 영빈 이씨고, 순조도 정조 14년(1790)6월 여기서 탄생했습니다. 순조의 모친이 정조의 후궁인 수빈 박씨이므로 후궁의 처소임이 확실하다고 보여집니다.
집복헌 남쪽마당에서 동쪽으로 조그만 집이 있습니다. 정조는 순조를 낳은 후궁 수빈 박씨를 매우 사랑해 집복헌에 자주 출입하면서여기서 가까운 영춘헌을 독서실 겸 집무실로 자주 이용했습니다. 그리고 재위 24년(1800년) 6월 49세로 여기서 승하하였습니다. 왕이 거처하기에는 영춘헌은 아주 초라한 건물입니다. 하지만 부드러운 비단옷을 마다하고 꺼칠꺼칠한 무명베를 입으며 하루 두 번만 수라상을 받았으며 자나깨나 백성과 나라만을 걱정하며 일생을 보냈던 검소한 정조에게는 딱 어울리는 건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정조는 죽을 때 등에 종기가 나서 고생을 많이 했는데 특히 여름철에 거친 무명베를 입고 있어서 더욱 고통 받았습니다. 왕의 총애를 받던 정약용은 정조의 죽음에 대해 “독살된 것 같다.”고 기록했습니다. 실록을 보면 신하들이 권하는 약을 피하는 모습이 나타납니다.
 

창경궁 후원일대
창경궁의 중궁전, 통명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