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 후원일대
문화원Ⅰ 2014.02.14
 


1) 성종태실비
성종태실비는 성종임금의 태를 모신 곳으로 원래 경기도광주에 있던 것을 1930년 옮겨왔습니다. 일제의 태실정비사업명목으로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대부분의 태실이 서삼릉으로 이전되었으나 성종태실만은 이곳으로 옮겨졌습니다. 태실 중에서 가장 양호한 것이었기 때문이라 추측됩니다.
태실은 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종 모양의 몸체를 놓고 팔각형의 지붕돌을 얹었고 윗 부분은 구슬 모양으로 장식하였습니다. 태실 부위에는 팔각형의 돌난간을 돌리고 난간 안에는 화강석으로 된 부채골의 넓적한 돌을 깔았습니다. 동쪽에는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를 갖춘 성종태실비가 있는데 뒷면에 성화 7년(1471) 윤 9월에 세우고 그 후에 3번 걸쳐 다시 세웠다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성종은 조선의 제 9대 왕으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25년 동안 왕위에 있으면서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등 조선의 문물제도를 완비하였습니다.

2) 풍기대(보물 846호)
바람의 방향과 세기를 측정하는 풍기를 꽂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받침대입니다. 영조 8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되며 풍기대 위의 구멍에 기가 달린 깃대를 꽂아 사용하였습니다. 깃대의 높이는 228.1cm이고 높이는 92.4cm, 상부 팔각주의 높이는 135.7cm입니다. 대에 인동초 무늬를 새겨 넣었습니다. 궁궐에 세운 이런 풍기대는 조선왕조의 농업기상학에 대한 관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유물로 <<증보문헌비고>>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궐 가운데에 풍기가 있는데 이는 곧 옛부터 바랍을 점치려는 뜻으로써, 창덕궁의 통제문 안과 경희궁의 서화문에 돌을 설치하고 거기에 풍기죽을 꽂아 놓았다"
이로부터 조선 후기에 궁궐에 돌로 만든 풍기대를 설치하고 풍기죽을 꽂아 바람을 점쳤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중궁전을 지나 궁궐 깊숙한 곳으로 더 들어가면 허리가 잘록한 조롱박모양의 연못을 만나게 됩니다. 이 연못이 춘당지입니다. 원래 춘당지는 윗부분의 작은 연못이고 아랫부분의 큰 연못은 왕이 농사 시범을 보이던 내농포였습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내농포를 없애고 윗부분과 아랫부분을 합쳐서 공원으로 조성을 하였습니다. 1983년 이후 복원하여 오늘날에 이루고 있으며 천연기념물인 원앙도 이곳을 보금자리로 삼고 있습니다.
춘당지 앞에는 창경궁 후원 내 넓은 마당인 춘당대가 있었습니다. 왕실에 경사가 있거나 유생을 시험하기 위해 창경궁의 춘당대에서 부정기적으로 문.무과 시험을 치르기도 하였습니다. 1572년 선조가 창경궁의 춘당대에 친림하여 치르게 한 데서 비롯되었는데 이 시험만으로 대과 3단계 시험의 마지막 단계인 전시를 보는 것과 같은 혜택을 주었습니다. 시험은 제술과만으로 하고 합격자 수는 일정한 정원이 없었습니다.


춘당지 주변을 거닐다보면 식물원 대온실이 보입니다. 대온실은 1909년에 건립한 최초의 서양식 온실로 철골 구조와 유리, 목재가 혼합된 건축물입니다. 창덕궁에 거처하는 순종을 위로한다는 명목 하에 일제강점기 때 창경궁 내에 동물원과 함께 지은 곳입니다. 비록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건물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온실로 근대문화유산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일본 황실 식물원 책임자였던 후쿠와가 1907년 설계하고 프랑스 회사에서 시공했는데 당시에는 동양 최대의 규모였습니다. 처음에는 대온실 후면에 원형 평면의 돔식 온실 2개를 서로 마주 보게 세웠으나 후에 돔식 온실 2개는 철거하여 현재 대온실만 남아 있습니다. 19세기 말 시작된 세계박람회 전시 건물의 형식을 따른 근대 건축물로 19세기부터 근대 건축에 사용되기 시작한 철과 유리가 우리나라의 건축물에 사용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원구단과 대한문
양화당, 영춘헌 일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