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구단과 대한문
문화원Ⅰ 2014.02.20
 


경운궁의 정문인 대한문의 맞은편에 보이는 것이 바로 하늘의 아들인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환구단입니다. 황제국가의 상징인 환구단은 일제강점기에 헐리게 되고 일제가 이를 헐어낸 자리에 호텔을 지어버렸습니다. 지금은 대한문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빌딩 숲 사이로 원구단의 부속 건물인 황궁우의 지붕만 겨우 보입니다.


 
덕수궁의 정문은 대한문입니다. 원래 궁궐의 정문은 남쪽의 인화문이었지만 인화문 앞이 큰 도로로 가로막혀 있어 정문의 기능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경운궁의 동쪽 문인 대한문은 앞에 넓은 도로와 광장이 있어 자연스럽게 대한문이 정문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한문의 원래 이름은 대안문이었는데,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한 이후 1905년 중건하면서 대안문에서 대한문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러나 왜 그렇게 바뀌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가 없습니다.
현재의 대한문이 서 있는 자리도 원래 자리가 아닙니다. 1912년 태평로의 확장으로 덕수궁 궁역이 축소됩니다. 그러나 대한문의 위치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았고 1968년 태평로가 다시 한 번 확장될 때 대한문이 도로 한 가운데 놓여지게 됩니다. 그래서 1970년 대한문을 옮기는 공사를 시작하여 1970년 겨울과 1971년 봄 사이에 마쳤습니다. 이후 2005년 대한문을 해체하는 대대적인 공사를 하게 되고 이 때 상량문을 발견하게 되는데 상량문 안에 33m 뒤로 밀려놓아져 있다는 기록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마도 1970년 공사할 당시 이동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으며 이 때 상량문을 넣은 것으로 추측합니다.
대한문은 3․1운동의 중심에 서기도 하였습니다. 고종황제의 장례식인 1919년 3․1일 대한문에는 흰옷을 입은 수많은 사람이 태극기를 들고 나와 독립만세를 외쳤습니다. 일본이 고종황제를 독살했다는 소문이 퍼지자 백성들은 분노했고, 여기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학생, 노동자, 농민, 종교인 등 전 국민이 일으킨 만세운동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그 이후 대한문은 시민들이 모이는 중심장소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우리 역사의 격동의 순간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는 것입니다.

※수문장 교대의식
조선시대 궁궐의 문을 책임지는 관청으로 수문장청이 있었다.
이들은 도성문의 개폐와 통행인을 검사하고 단속하는 임무를 담당하였다.

군호하부의식

암호를 수문장 및 수문군에게 알려주는 의식

암호는 매일 세 글자 이내로 정함

군호응대

교대하는 수문군들이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암호 확인하는 절차

초엄

궁성문의 열쇠가 들어있는 약사함을 인계하는 절차

중엄

부신을 맞추어보고 순장패를 인계하는 절차

삼엄

수문군들이 서로 교대하는 절차

예필

수문장교대의식이 끝났음을 알리는 절차

순라의식

교대의식을 마친 수문군들이 순찰하는 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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